학교 이야기

1년 전쯤 졸업생 입장에서 바라본 마이스터고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올린 적이 있었어요. 올리고 나서 글을 다시 보니 개인적이고 부정적인 감정만을 전달한 것 같아 빛보다 빠르게(…) 삭제했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생각과 감정들이 정리된 지금, 다시 글을 적어보려 해요.
작성한 내용은 개인적인 경험담으로, 마이스터고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모든 일에는 Case by Case 가 있다는 것 알아주세요!
마이스터고 왜 갔어요?
시골쥐 제로
초-중학교 시절을 지방 소도시에서 보내오며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성적은 중상위권을 유지했지만, 그 또한 지방 기준이었고 대학 입시를 실패했을 때 제가 느끼게 될 좌절감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보수적인 학교의 룰을 지키는 것에 대한 피로감도 있었구요. 그래서 중학생 제로는 새로운 길을 찾아나섭니다!
서울에 가자!
서울에 가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멋진 사람들을 팔로잉하다 보면 나 자신의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그래서 서울 소재의, 기숙사 고등학교를 가고 싶었습니다.
어린 시절 유난히 조별과제.
전 제가 사는 지역의 캠프, 경진대회 같은 건 장르 불문 다 참여했었어요.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하기 어렵지만, 어느 순간 그게 일상이 되고 제가 좋아하는 일이 되어있더라구요. 다양한 프로그램 중 제가 가장 애정하는 건 조별과제(!) 였습니다. 뭔가 만들어내고 그걸 사람들이 대단하다며 좋아해 주면 형용할 수 없는 성취감을 느꼈어요. 그 감정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매번 발표를 맡곤 했답니다. 만들고 선보이는 것에 익숙해진 저는 Maker가 되고 싶었습니다. 문득 떠오른 건 대학교 탐방을 갔을 때 보았던 컴퓨터공학과 과방의 모습이었습니다. 빛도 잘 안 들어오는 작은 방에서 맥북을 펼치고 무언가 ‘만들기’에 몰두해 있는 대학생. ‘내 삶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현실
서울에 상경할 계획을 세운 만큼, 빠르게 시작해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졸이라는 이유로 내 능력이 평가절하되지 않는 직군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해보았어요. 아시겠지만 제 앞에 놓인 건 개발자의 길이었죠! 결론에 다다르자 지체하지 않고 조건이 맞는 마이스터고 한 곳에 원서를 넣었습니다. 무난히 합격해서 지금의 제로가 되었습니다.
기대와 실망
여자 사관학교
학교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인사하는 법이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노멀한 학교의 인사법이죠.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인사 소리가 이게 뭐냐! 다시!
선생님의 호통을 들으며 20번쯤 배꼽 위에 손을 올리고 폴더 인사를 하다 보니, 뭔가 심히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위에서 말했듯 저는 보수적인 학교의 룰을 지키는 데 피로감을 느껴, 자유롭고 대학교 같은 분위기라고 들어왔던 마이스터고에 가고 싶었습니다. 자유를 찾아 떠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이 있듯 저는 자유를 찾아 수녀원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
그 외에도 이해할 수 없는 룰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비치는 스타킹 금지, 머리 풀고 다니기 금지, 머리끈 디자인 제한, 실핀 갯수 제한, 양말 색은 검은색 또는 흰색, 키링 금지, 패딩조끼 금지, 주기적으로 실시되는 치마 길이 제한, 등…. 개발자로 일하는 것과 양말 색이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켜야만 했습니다.
시골쥐에서 지방러
기숙사에 입학한 저는 짐이 꽤 적은 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처음 해보는 합숙 생활에 미처 챙기지 못한 짐들이 있었고, 부모님께선 택배를 통해 보내주려 하셨습니다. 학교에서 택배를 어떻게 받는지 물어보려 한 그때….
학교로 택배 보내거나 하는 말도 안되는 행동 하지 않도록.
네, 그렇습니다. 학생들은 학교로 택배를 보낼 수 없었어요. 집이 대중교통으로 3-4시간 거리였던 저에게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생필품 같은 것도 인터넷에서 구매할 수 없어, 통학하는 친구들에게 사정하여 배송지를 구해야 했어요. 하지만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무거운 짐 같은 것은 직접 픽업하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에 학교 앞 편의점에 부탁드리기 일쑤였고, 편의점에서 거절당하자 정말 방법이 없어져서 무거운 짐을 들고 몇 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건의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숙사비를 내지 않는 마이스터고 특성상, 싫으면 나가. 너 말고도 기숙사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 많아. 라는 식으로 응대하셔 울며 겨자먹기로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길을 잃었다
HTML, CSS, JS, JQuery, JSP, Java, Python, Spring, C, C#.
제 첫 이력서에 쓰여 있던 기술 스택이었습니다. 맥락 없이 그저 많지 않나요? 개발자 취업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알아보고 나서야 제 이력서가 실효성 없는 이력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교의 교육 과정 특성상 한 과목을 깊게 팔 수 있는 구조도 아니었고, 선택 과목이 존재했지만 개발자 직군별로 세심하게 분류되어있지 않아 난해한 로드맵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현실을 깨닫고 나서 내가 프론트엔드 개발자로서 취업하려면 얕고, 다양한 지식보다는 하나라도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개인적으로 React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친구들과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경험을 쌓았고, 이때 배운 것들로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졸업 전까지 학교의 로드맵만 그대로 따라갔다면…. 지금의 회사에 취업할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취업 가스라이팅
마이스터고에서의 취업은 학교 주관 취업, 고졸 특채 공채 취업, 자가 취업 이렇게 세 분류가 있습니다. 제 기수에서는 저만 졸업 전 자가 취업을 한 것 같아요. (확실하진 않습니다) 대부분 학교에서 소개해주는 회사에 취업했다는 뜻이죠! 개발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회사를 가서 큰 성장을 이뤄내고 있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회사도 많았습니다. 최저 시급보다 낮게 줄 수 있는 인턴 기간만 일을 시키고 뽑았던 4명 중 3명을 내보낸 회사라던지, 사수 개발자가 없어서 혼자 개발을 해야 하는 회사라던지 소위 블랙 기업이 꽤 있었어요.
학교의 기준을 모두 통과해 적합한 회사만 취업 공고를 올린다. 걱정할 필요 없다. 라는 말과 취업한 친구들의 경험담은 차이가 있었어요. 심지어는
첫 회사 별로 안 중요해. 개발자는 어차피 이직하면 돼.
라며 합리화하거나, 학교에 취업 설명회를 온 기업에 반 강제로 면접을 보게 하는 등 취업률을 억지로 올려보려는 시도들을 많이 보았어요. 취업률 99.9%라는 말을 만들기 위해 학생들의 커리어를, 이토록 무신경하게 대하는구나 싶은 실망감이 몰려왔습니다.
저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자가 취업으로 현 회사에 취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급히 해명합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 대부분은 마이스터고를 꿈꾸거나, 이미 마이스터고 학생이거나, 혹은 IT업계 종사자일 것 같아요. 마이스터고를 꿈꾸거나 이미 마이스터고에서 공부하고 계신 분들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실제로 친동생도 제 사례를 듣고도 마이스터고에 가기도 했구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만들고 발표하는 걸 좋아했던 중학생이 개발자가 되기까지 분명 학교의 도움이 존재했습니다. 아낌없는 애정과 동기 부여를 도와주셨던 고마운 선생님들, 희노애락을 같이했던 좋은 친구들, 현업에서 도움이 되었던 몇몇 교과 공부들 모두 저 혼자서 이뤄낼 수 없는 것들이었겠죠.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건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경각심입니다. 2학년 때까진 학교에서 해주는 대로 마냥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나도 멋진 개발자가 되어있겠지! 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물 안 개구리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취업하기로 마음먹어서, 마이스터고에 진학했다면 또는 할 예정이라면,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에 다다른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보세요.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민하세요. 취업 시장의 평균치와 비교해 보았을 때 나 자신에게 경쟁력이 있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해보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으세요. 어른들에게 그저 휘둘리지 않고 취업 준비 자체가 나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임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현업에서 일하며 잊어버린 마음들이 많고 멈춰있을 때도 많지만, 오늘 적어둔 내용들을 되새기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요! 이상적으로 들릴 순 있지만 어떤 환경에 있든 모두모두 화이팅입니다.